강호인으로 살기/무림천하

만류귀종 1

이 강산 2010. 4. 26. 18:45

비가 오려나 봅니다.
이번 여름 엔 유난히도 비가 많이 내립니다.

"이러다가 집에 돌아 갈 때까지 맑은 햇살 한번 못 보는 건 아닐까?"

어쩌다 비가 그쳐도 지금처럼 잔뜩 구름만 끼어 있으니..
이번 여행은 정말 별 볼일 없어질 것 같아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아.., 내가 지금 등진 곳..., 뿌옇게 안개비가 허리를 감아 돌아 한층 더
신비한 모습으로 서 있는 저 산은 정말 태산입니다."

난 바로 몇 시진 전 그 곳을 떠나왔습니다.
그곳에 있다는 유명한 태산 서원에서 일년이나 학문에 열중 하다가 이젠 모든 수학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죠.
나는...
지금 날씨와는 달리 너무나 기쁩니다.
집 떠나온 지 10년...
강산이 바뀐다는 그 시간을 온갖 곳을 여행하며, 온갖 고생을 했으니까요.

"나의 아버지요?"

생각할수록 정말 지독한 사람입니다.

"젊어 고생은 사서 하다니요.."

세상에 그건 옛날 옛적 이야기 이지, 지금은 얼마나 애지중지 자식들 과보호 하느라 난리인데...

"내 어머니...?"

아! 묻지 마세요.
갑자기 눈물이 납니다.
넘 보고 싶어집니다.
경공 이라도 펼쳐 한 순간에 휘익 날아가서 엄마 품에 안겨 보았으면....
하지만...
하지만 말이죠...
이제 겨우 열 살이 넘은 나를 보내던 어머니...
아버님 곁에서 훌쩍대면 집 떠나기 싫다는 나를 아버님보다 더 매정한 얼굴로 학문을 읽히라고 쫒아내던 그 살벌한 눈빛... 그 이쁜 울 어머니가 세상에나 그렇게 무섭다니...
나찰 보다 무서웠던 그 눈빛 생각하니 경공을 펼치고 싶은 생각이 싸악 가십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서 온갖 세상구경 다 하면서 가야지.
그러다가 아버지 회갑연에 늦으면 어쩔 수 없지 뭐...
뭐 그런 심정으로 난 집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날씨가....
제길 하늘만은 나의 이 계획을 들어줘야 하는 거 아냐...
정말 하늘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나..., 정말 고생 많이 했습니다.
열 살 에 집에서 쫒겨 나 강호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구산서원을 모두 돌며 오로지 학문을 익히는데
정진 또 정진 했으니까요.

"왠 놈의 책 들이 그리 많은지..."

난 맨 처음 같던 학림서원에서 그 많은 책을 보고 얼마나 놀랬는지...
집에 있을 때 부터 워낙 많은 책을 읽어서 그나마 뒤로 넘어가지 않았지.
책 하고 담 쌓은 사람이라면 졸도를 수도 없이 했을걸...
그치만 난 참 묘한 놈인가 봅니다.
읽을 책이 많으니 한 없이 기분이 좋더라 이겁니다.
책 속에 빠져 죽더라도 읽을 책이 있다면..
집에 있을 때의 소원이 그 거 였 으니 까요.
그런데 그 곳에 그렇게나 많이 내가 읽지 않는 책이 있으니 놀라기도 했지만
얼마나 기쁘던지...
난 그래서 그 곳에서 한 삼년을 머물며 모든 책을 다 읽어버렸죠.
한 삼만 권은 될까? 그 많은 책이 모조리 내 머리 속에 들어 간 거죠.
그리고....
그곳에서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자 다른 곳으로 갔답니다.
두 번째로 간 구룡서원 이란 곳도 대단 하더군요.
학림서원 못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그 곳에서 내가 읽을 책이라고는 한 만권 정도 밖에 안되더군요.
나머지는 모두 중복된 것들이고...
어쩧튼 난 그런식으로 강호의 책이 많이 모인 곳이라면 어디든 갔습니다.
이른바 구산 서고를 모두 돌아 보았으니 내가 생각해도 엄청 대단 한 일이죠.
나처럼 속독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아마 백년? 아니 천년이라도 모자랄걸요?
아까 내가 말한 뒤에 보이는 태산...
그 태산서원이 구산서원중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죠.
책은 다른 곳에 비해 많지 않았지만 제법 귀한 것들도 있더군요.
하긴 황성에 있다는 황제가 천제를 드리고 난후 가끔 방문 한다는 말도 있으니
그럴만도 하겠죠.

날씨가 이 모양인데도 내 발걸음이 무겁지 않는 건 순전히 그런 이유입니다.
자부심...
이제 더 이상 배울게 없다는 자만감.. 뭐 그런 것도 있겠죠.
배가 고픕니다.
돈도 별로 없는데...
그동안 주로 채식만 해서 이젠 고기도 먹고 싶은데...
원주는 스스로 알아서 하라며 겨우 은자 닷냥을 아까운 듯 입맛을 다지며 주었으니..
그렇게 왕소금일줄 알았으면 낡은 현판을 새로 써주는 것이 아닌데 후회가 가슴을 찌릅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석달 전 쯤 내가 장난삼아 그리던 그림을 원주가 몰래 갖고 나가, 은자 오백 냥이라는 거금을
받고 팔아서 착복했다는 것을...
그걸 알고도 모른체 했는데, 에이 왕소금...
난 닷 냥 으로 할 수 있는 걸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래 생각 할 것도 없던군요.
낡아서 빨아도 빨아도 누우런 데다가, 헤져서 나의 옥 같은 피부를 언뜻언뜻 보이게 하여
괜히 지나가는 아리따운 협녀들 의 흘깃거림의 대상밖에 안되는 이 백삼을 바꿔 새 옷으로
사입는데 최소 세 냥은 될 것이고... 나머지는 만두나 소면을 먹으면 더 이상은 계산이 안되더군요.

저기 옷가게가 하나 보이는 군요.
만사 제쳐 놓고 우선은 옷이나 하나 사 입어야지.
옷이 날개라고 했는데, 스무 살 꽃다운 청춘... 꾸며야 사람 구실 하지.
난 옷가게로 들어가니 내 말을 더 듣고 싶은 강호인 들은 기다리세요.
구질 구질 흥정해가며 싸구려 옷 한 벌 사 입는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요.
뭐 옷 갈아 입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할 수 없지만....